▶ “육수 레시피는 한 글자도 안 바꿨지만, 주방 시스템은 완전히 바꿨다”
▶ 배달·포장 비중 35%로 확대… “전통 맛집도 변해야 살아남는다”
▶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화해… “결국 맛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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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하게 AI(인공지능)가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40년 전통 냉면집 3대째 사장인 이유진(38) 씨가 가게 앞에 서 있다. (사진 = 제미나이) |
◇ 시할머니의 손맛에서 시작된 40년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한 골목 안쪽,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치에 ‘원산냉면’(가명)이 있다. 간판은 낡았고 외관은 소박하지만, 점심시간이면 줄이 늘어서는 이 가게는 1986년 문을 열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시할머니는 원래 함경남도 원산 출신이셨대요. 6·25 때 피난 오셔서 서울에서 냉면집을 시작하신 게 이 가게의 시작이에요.” 현재 이 가게를 운영하는 이유진 씨(38)의 설명이다. 이 씨는 가게 창업주의 손자며느리, 즉 3대째 경영자다.
창업주인 시할머니 故 김순옥 여사는 고향 원산에서 먹던 냉면의 맛을 재현하기 위해 수십 년간 육수 레시피를 다듬었다. 소 사골과 양지, 돼지 사태를 12시간 이상 고아 만드는 육수는 담백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특징이다. 면은 순메밀로 직접 뽑고, 겨자 소스와 식초도 자체 배합한다.
2003년, 시할머니가 건강 문제로 은퇴하면서 가게는 며느리인 박정순 씨(현재 67세)에게 넘어갔다. 박 씨는 시어머니의 레시피를 그대로 이어받아 20년간 가게를 지켰다. “어머니(시어머니)가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육수 끓이시는 걸 10년 넘게 옆에서 봤어요. 레시피 노트도 있지만, 결국은 손끝의 감각과 경험으로 배운 거예요.” 박 씨의 회고다.
그리고 2023년, 박 씨가 관절 수술을 받으면서 가게 경영이 며느리인 이유진 씨에게 넘어갔다.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5년간 메뉴 개발 업무를 했던 이 씨의 합류는 40년 된 냉면집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러왔다.
◇ “육수는 한 글자도 안 바꿨습니다”… 전통을 지키는 방식
이유진 씨가 가게를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꾸지 않을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시어머니)께 처음 드린 약속이 ’육수 레시피는 절대 안 바꾸겠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실제로 레시피는 한 글자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 씨는 시어머니에게서 육수 만드는 법을 배우는 데 만 1년을 투자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시어머니 옆에서 육수를 함께 끓이고, 시어머니가 “이 정도면 됐다”고 할 때의 농도, 색감, 향을 체화했다. “레시피 노트에는 ‘소금 적당히’, ‘좀 더 끓인다’ 같은 모호한 표현이 많아요. 그걸 정확한 수치로 바꾸는 작업을 했어요. 소금 15g, 95도에서 45분 추가 가열… 이런 식으로요. 하지만 이건 레시피를 바꾼 게 아니라, 표현을 명확히 한 거예요.”
레시피의 수치화는 또 다른 효과를 가져왔다. 이 씨 외에 다른 직원도 일정한 품질의 육수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어머니가 안 계시면 가게를 못 열었어요. 지금은 제가 없어도 직원이 같은 맛을 낼 수 있어요. 물론 최종 점검은 제가 하지만요.”
다만 면 뽑기만큼은 여전히 이 씨가 직접 한다. “면은 그날의 온도, 습도에 따라 반죽의 수분량을 미세하게 조절해야 해요. 이건 아직 수치화가 안 됩니다. 손의 감각으로밖에 못 해요.” 이 씨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그날의 면을 직접 뽑는다.
◇ 바꿔야 할 것은 과감히… 주방 시스템과 경영의 혁신
전통을 지키는 동시에, 이 씨는 경영 방식에서는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 시스템의 현대화였다. “처음 가게에 왔을 때 가장 놀란 건 주방이었어요. 재료 재고 관리를 수첩에 적고, 발주도 전화로 하고, 매출 정산도 수기로 했어요.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일할 때는 상상도 못 한 방식이었죠.”
이 씨는 먼저 POS 시스템을 도입했다. 기존에는 종이 전표로 주문을 받고 수기로 매출을 집계했지만, 태블릿 기반 POS를 도입하면서 주문·결제·매출 분석이 자동화되었다. “처음에 어머니가 ’기계가 주문을 받으면 손님 마음을 어떻게 아느냐’며 반대하셨어요. 그래서 카운터 주문은 그대로 직원이 받고, 뒤에서 POS로 입력하는 방식으로 타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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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하게 AI(인공지능)가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전통 방식의 조리와 현대적 관리 시스템이 공존하는 원산냉면의 주방. (사진 = 제미나이) |
재고 관리도 혁신했다. 식재료별 사용량을 데이터로 축적하고, 요일·날씨·계절에 따른 판매량 패턴을 분석하여 발주량을 최적화했다.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비 오는 월요일은 평소의 60% 수준밖에 안 팔리더라고요. 그런 날은 식재료를 줄여서 발주하면 폐기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어요.”
이 결과, 식재료 폐기율이 인수 전 12%에서 현재 4%로 줄었다. 이것만으로도 월 약 80만 원의 비용이 절감되었다.
배달·포장 서비스 도입은 가장 큰 논쟁이었다. 박정순 씨(시어머니)는 강하게 반대했다. “냉면은 만들자마자 바로 먹어야 맛이에요. 배달하면 면이 불고 육수가 미지근해져요. 40년 지켜온 맛을 배달 그릇에 담을 수 없어요.” 시어머니의 입장도 일리가 있었다.
이유진 씨는 타협점을 찾았다. 면과 육수를 분리 포장하고, 전용 보냉 용기를 개발했다. 면은 진공 포장하여 식감을 유지하고, 육수는 냉동 상태로 배달하는 방식이다. “어머니도 ’이 정도면 맛이 유지되네’라고 인정하셨어요. 물론 매장에서 바로 먹는 것만은 못하지만, 80% 이상은 재현할 수 있는 수준이에요.” 배달·포장 매출은 현재 전체 매출의 약 35%를 차지한다. 이 덕분에 전체 매출은 이 씨가 경영을 맡기 전 대비 약 2.1배로 늘었다.
◇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화해… “결국 맛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같았다”
변화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유진 씨와 시어머니 박정순 씨 사이에는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다. “가장 크게 다툰 건 가격 인상이었어요.” 이 씨가 경영을 맡았을 때 냉면 한 그릇 가격은 8,000원이었다. 주변 냉면집들이 1만~1만 2,000원을 받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저렴했다. 이 씨는 원가 분석을 한 뒤 가격을 1만 원으로 올리자고 제안했다.
“어머니가 ’단골손님들한테 어떻게 면목이 있냐’며 반대하셨어요. 하지만 계산해보니 인건비와 재료비를 빼면 한 그릇당 마진이 500원도 안 되는 거예요. 이대로면 가게를 유지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이 씨는 숫자를 보여주며 설득했다. 매출, 원가, 인건비, 임대료 등을 정리한 손익계산서를 시어머니에게 보여드렸다. “어머니가 숫자를 보시고 한참 말이 없으셨어요. 그리고 ’네가 계산한 게 맞을 거다. 그런데 단골손님들에게는 미리 말씀드려라’라고 하셨죠.”
가격 인상 후 우려했던 고객 이탈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단골 고객들은 “진작 올려야 했다”, “이 가격에 이 맛이면 싼 거다”라는 반응이 많았다.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신뢰로 바뀌었다. “지금은 어머니가 주 3회 가게에 오세요. 육수 맛을 봐주시고, 면 반죽 상태를 확인하시고, 새 직원이 오면 교육도 도와주세요. ‘맛 감독관’ 역할이죠.” 이 씨가 웃으며 말했다.
박정순 씨에게도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며느리가 가게를 망칠까 봐 걱정이 많았어요. 그런데 지켜보니 이 아이가 맛에 대한 존중은 확실하더라고요. 바꿀 건 바꾸되, 맛은 절대 안 건드리니까. 어머니(시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기특해하셨을 거예요.”
◇ 3대 가업의 미래… “100년 냉면집이 목표”
이유진 씨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솔직히 2호점을 낼 생각은 없어요. 이 한 가게에서 최고의 냉면을 내는 것, 그게 제 목표예요. 다만 경영 방식은 계속 발전시킬 거예요.” 현재 그녀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냉면 체험 프로그램’이다. 외국인 관광객이나 어린이 단체를 대상으로, 직접 메밀 반죽을 하고 면을 뽑는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전통 음식 문화를 알리면서 부가 수익도 올릴 수 있는 방법이에요. 시어머니도 이건 좋아하세요. ’아이들이 메밀 반죽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하시면서요.”
이 씨는 매출 데이터, 고객 피드백, 원가 분석 등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할머니는 레시피를 남겨주셨고, 어머니는 손맛을 남겨주셨어요. 저는 경영 시스템을 남기고 싶어요. 다음 세대가 이 가게를 이어받을 때, 맛도 경영도 모두 탄탄한 상태로 물려주고 싶습니다.”
한국외식산업연구원 정재호 원장은 “전통 음식점의 가업 승계는 한국 외식 문화의 중요한 자산”이라며 “이유진 씨의 사례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경영을 혁신하는 균형 잡힌 승계의 모범”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정부와 지자체가 전통 음식점의 가업 승계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관계자 역시 “가업 승계는 단순히 가게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기술·문화·경영 노하우를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과정”이라며 “공단에서도 가업 승계 전문 컨설팅, 경영 혁신 지원, 브랜드화 지원 등 맞춤형 프로그램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40년 전 한 실향민 여성이 고향의 맛을 그리며 시작한 작은 냉면집. 그 가게가 딸에게, 다시 며느리에게 이어지면서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독특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유진 씨가 꿈꾸는 ’100년 냉면집’이 실현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시할머니의 레시피, 시어머니의 손맛, 그리고 며느리의 경영 혁신이 어우러진 이 가게의 여정은 소상공인의 가업 승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범 사례로 남을 것이다.
소상공인포커스 / 김영란 기자 supu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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