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정책은 바뀌는데 왜 달라진 게 없는가

소상공인 심층/기획 / 김경훈 대기자 / 2025-12-04 10:3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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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은 매년 바뀌지만 시스템은 그대로인 이유
'행정 프로그램'을 넘어 기업의 '시장 주도권'을 만드는 시스템으로
▲ 매년 쏟아지는 지원 사업 공고 속에서도 중소기업들이 '제자리걸음'을 호소하는 이유는 정책의 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업의 생애주기를 관통하는 '성장 경로'가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산 집행률과 단기 지표에 매몰된 1년 단위의 '행정용 사업'들이 기업의 축적된 시간을 단절시키는 구조적 모순을 깨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한 보조금의 순환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사진=코엑스)

 

 

중소기업 대표들과 현장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다. “사업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위치는 그대로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다. 정책 체감의 구조를 드러내는 진단이다. 매년 새로운 지원 사업이 발표되고, 예산이 배정되며, 신청 공고가 올라온다. 지원 항목은 세분화되고 대상도 확대된다. 겉으로 보면 정책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 기업이 시장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납품 구조는 유지되고, 가격 협상력은 제한적이며, 거래 조건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지원은 있었지만 힘은 생기지 않는다. 왜 이런 간극이 생기는가. 문제는 정책의 양이 아니라 정책의 설계 단위에 있다.

 

◆ 정책의 단절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한국의 중소기업 정책은 대부분 ‘사업 단위’로 설계된다. 하나의 사업은 예산과 함께 만들어지고, 일정 기간 집행된 뒤 평가되고 종료된다. 다음 해가 되면 또 다른 사업이 등장한다. 행정적으로는 합리적인 구조다. 예산 통제가 가능하고, 집행률을 관리하기 쉬우며, 단기 성과를 수치로 제시하기에도 적합하다.


그러나 기업의 성장 구조는 연도 단위로 움직이지 않는다. 기업은 연속적으로 축적된다. 기술은 반복 생산을 통해 정밀해지고, 거래는 시간을 통해 신뢰로 전환되며, 시장 내 위치는 점진적으로 이동한다. 기업의 시간은 이어지지만 정책의 시간은 끊어진다. 이 단절이 체감 부재의 출발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제조 중소기업이 1년 차에는 기술개발 지원을 받고, 2년 차에는 마케팅 지원을 받고, 3년 차에는 해외 전시회 지원을 받는다. 세 가지 사업을 경험했지만, 이 사업들이 하나의 성장 경로 위에 배치되지 않는다면 기업은 이동하지 않는다.


기술개발이 계약 구조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케팅이 거래 지속 구조로 연결되지 않으며, 전시회 참가가 실질적 시장 진입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지원은 경험으로 끝난다. 기업은 다양한 사업을 수행했지만 산업 안에서의 좌표는 그대로다.


대만은 이 지점에서 출발점이 다르다. 정책을 만들기 전에 기업의 단계별 위치를 먼저 정의한다. 창업 초기, 기술 축적 단계, 수출 진입 단계, 확장 단계처럼 성장 구간을 명확히 구분한다. 그리고 각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동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설정한다.


정책은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배치된다. 기술개발은 단순 연구가 아니라 시장 진입을 위한 준비 단계로 설계되고, 수출 지원은 행사 참가가 아니라 실제 계약 구조 진입을 목표로 구성된다. 개별 사업은 경로 위의 장치일 뿐이다. 경로가 먼저 존재한다.


반면 한국은 사업은 많지만 이동 통로가 약하다. 기업은 매년 다른 사업을 신청하지만, 5년 뒤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산업적 설계는 명확하지 않다. 지원은 존재하지만 기업의 이동 좌표는 제시되지 않는다. 지원은 축적되지 않고 분절된다. 분절된 지원은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왜 우리는 사업 단위 설계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단순한 의지 부족이 아니다. 예산 구조와 평가 체계, 그리고 행정 책임 구조가 결합된 결과다. 한국의 중소기업 예산은 대부분 연 단위로 편성된다. 예산은 집행되어야 하고, 집행률은 성과로 관리된다. 미집행은 문제로 기록되고, 집행 지연은 감점 요인이 된다. 이 구조에서는 장기 경로 설계보다 단기 집행이 우선이 된다.

 

성과 역시 단기 지표로 측정된다. 참여 기업 수, 지원 건수, 매출 증가율 같은 지표는 빠르게 보고서에 담을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의 산업 내 위치 이동은 즉각적인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다. 납품 구조에서 벗어나는 과정, 가격 협상력이 형성되는 과정은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행정은 단기 성과를 요구하고, 산업은 장기 축적을 요구한다. 이 시간 차이가 정책을 사업 단위에 묶어 둔다. 또한 담당자의 순환 구조도 영향을 준다. 정책 담당자는 일정 기간 후 교체된다. 사업은 연도 단위로 정리된다. 이 환경에서 기업의 5년, 10년 경로를 추적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정책의 단절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이 구조가 지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업은 정책을 성장 전략으로 보지 않게 된다. 사업은 구조 이동의 통로가 아니라 단기 보조 수단으로 인식된다. 경영 계획은 산업 내 위치 이동이 아니라 연도별 사업 일정표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 순간 정책은 산업 설계 도구가 아니라 행정 프로그램으로 축소된다. 그리고 산업은 서서히 고착된다.


시장 안에서의 위치가 이동하지 않는 기업은 같은 협상 구조 안에 남는다. 가격을 정하지 못하고, 계약 조건을 바꾸지 못하며, 거래 구조를 주도하지 못한다. 지원은 있었지만 힘은 생기지 않는다. 정책이 체감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여기에서 출발한다. 사업은 변했지만 시스템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질문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매년 새로운 사업을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기업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경로를 설계하고 있는가. 연도 단위 예산 구조 안에서 장기 성장 경로를 추적할 수 있는가. 성과를 집행률이 아니라 산업 구조 변화로 평가할 수 있는가. 정책은 집행되고 있다. 그러나 산업은 실제로 이동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변화는 계속 발표될 것이다. 그리고 현장의 말 역시 쉽게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책은 바뀌었는데, 우리는 그대로입니다.”

 

 

소상공인포커스 / 김경훈 대기자 kkh429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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