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匠人 줌인] 3대째 이어온 충무로 인쇄소,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명함’으로 살아남다

소상공인24 / 이지원 기자 / 2026-06-23 1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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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로 인쇄소 거리, 1990년대 800여 곳에서 현재 230곳으로 71% 감소… 폐업 가속화
▶ 활판 인쇄 명함 단가 일반 디지털 명함의 7배(장당 800~1,200원), 그러나 주문량 4년 연속 증가
▶ 3대 인쇄소 ‘대성인쇄’ 박종민 사장 — 2025년 활판 명함 매출 7,200만 원, 전체 매출의 38% 차지
▶ ‘디지털 피로감’ 시대, 아날로그 감성·물성·진정성이 새로운 차별화 가치로 부상
▲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하게 AI(인공지능)가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충무로 3대 인쇄소에서 활판 활자를 직접 조판하는 사장. (사진 = 제미나이)

 

 

◇ “디지털 시대에 누가 종이 명함을 쓰겠어? 그런데 늘었어요”
서울 중구 충무로 5가, 인쇄 골목의 한 모퉁이. 1958년 창업한 ’대성인쇄’의 3대 사장 박종민 씨(57)는 6월 어느 오후, 활판 인쇄기 앞에서 한 통의 명함을 조판하고 있다. 그가 하나하나 손으로 집어 배치하는 작은 금속 활자들. 한 장의 명함을 만들기 위해 그는 평균 25분을 쓴다. “디지털 시대에 누가 종이 명함을 쓰겠어? 그런데 늘었어요. 활판으로 만든 명함을 일부러 찾는 사람이 매년 더 많아져요”라는 박 씨의 말이다.


대한인쇄정보산업협회 자료에 따르면 충무로 인쇄 거리의 인쇄소는 1990년대 정점 시절 800여 곳에서 2026년 현재 230곳으로 71% 줄었다. 디지털 인쇄·온라인 명함 서비스의 확산으로 전통 인쇄업이 사양길에 접어든 결과다.


그러나 박 씨의 ’대성인쇄’는 흐름을 거슬러 가고 있다. 2022년 매출 8,200만 원에서 2025년 매출 1억 9,000만 원으로 2.3배 늘었다. 그 중 활판 인쇄 명함의 매출이 7,200만 원, 전체 매출의 38%를 차지한다.


◇ 활판 명함, 장당 1,000원의 가치
박 씨가 만드는 활판 명함의 가격은 100매 기준 8만~12만 원. 장당 800~1,200원이다. 일반 디지털 인쇄 명함(장당 100~150원)의 7~8배다. 그럼에도 주문은 매년 늘고 있다. 활판 명함의 매력은 ’물성(物性)’에 있다. 금속 활자가 종이를 눌러 만든 미세한 자국, 잉크의 깊이감, 종이의 텍스처가 디지털 인쇄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감각을 만든다. 손으로 만지면 미묘한 요철이 느껴진다.


박 씨는 “활판 명함은 만드는 시간이 디지털의 30배가 든다. 그래서 비싸다. 하지만 100장 만드는데 한 사람 25분, 200장은 50분. 그 시간 동안 한 분 한 분께 정성을 담는다”고 말한다.


활판 명함 단골 손님 중에는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건축가, 변호사, 셰프 등 ’자기 브랜드’를 중시하는 직업인이 많다. 강남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김모 씨(38)는 “내 명함이 곧 나를 표현하는 첫 번째 디자인이다. 활판 명함을 받은 클라이언트는 한 번 더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기억해 준다”고 말했다.


◇ 3대째 이어온 가업, ’활자 6만 개’의 유산
대성인쇄의 역사는 1958년 박 씨의 조부 박순흥 씨(작고)가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박 씨의 부친이 1980년대 가업을 이어 본격 인쇄소로 키웠고, 박 씨는 1995년 가업을 물려받았다. 대성인쇄의 가장 큰 자산은 한자 활자 4만 8,000개, 한글 활자 1만 2,000개로 이루어진 ’활자 케이스’다. 3대에 걸쳐 모은 활자들이 인쇄소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활자 한 개의 무게는 약 4그램, 전체 활자의 무게만 240kg에 달한다.


“이 활자들이 우리 가게의 영혼이다. 한 개라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박 씨는 매일 영업 마감 후 활자 케이스 정리에 30분을 쓴다. 활판 인쇄는 사라져 가는 기술이다. 한국에 활판 인쇄가 가능한 인쇄소는 30곳 미만으로 추정된다. 박 씨처럼 한자 활자까지 보유한 곳은 10곳도 안 된다.

 

 

▲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하게 AI(인공지능)가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정성껏 만든 활판 명함을 손님에게 건네는 3대 인쇄소 사장. (사진 = 제미나이)



◇ “디지털 피로감”이 만든 아날로그 부활
활판 명함의 부활은 단순한 향수 마케팅이 아니다. 사회적 트렌드의 변화가 그 배경에 있다. 한국마케팅학회 김인영 교수는 “코로나 이후 디지털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아날로그의 감각’을 적극 소비하려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종이 책, LP 음반, 필름 카메라, 활판 명함 등이 모두 같은 맥락이다. 디지털이 보편화될수록 아날로그의 희소성이 커지고, 그것이 새로운 차별화 가치가 된다”고 분석한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2026년 소비 트렌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8.7%가 “디지털 도구의 과도한 사용에 피로감을 느낀다”고 답했고, 42.3%가 “아날로그 감성의 제품·서비스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박 씨도 이런 흐름을 체감한다. “처음에는 활판 명함이 비싼데 누가 사겠나 싶었다. 그런데 한 번 만들어 본 손님이 또 주문하고, 친구에게 소개해 준다. ’내 명함은 대성인쇄’라는 분이 많아졌다”고 했다.


◇ “사라져 가는 것을 지키는 일”
박 씨에게도 고민은 있다. 후계자 문제다. 그의 아들(30세)은 IT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가업을 이을 계획이 없다. “내가 정년퇴직하는 시점에 이 인쇄소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은 무겁다.


서울시 도시재생본부는 충무로 인쇄 거리를 ’도시문화재 후보지’로 지정하고 인쇄 골목 전체를 보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2025년부터 ’충무로 인쇄 거리 활성화 사업’에 30억 원을 투입해 전통 인쇄 기술 전수 교육, 청년 인쇄 창업 지원 등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문화본부 김은영 학예사는 “충무로 인쇄 거리는 한국 인쇄 산업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박종민 씨 같은 장인들이 보유한 활판 인쇄 노하우는 무형문화재급 가치를 지닌다. 사회적 보존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정현주 본부장은 “전통 인쇄 기술의 보존은 단순한 옛것의 보존이 아니라, 한국 디자인·공예 문화의 깊이를 만드는 토대다. 활판 명함, 활판 청첩장, 활판 도서 등 현대적 활용 영역도 무궁무진하다”고 평가했다.


◇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명함”
박 씨는 매일 자신이 만드는 명함 한 장 한 장에 정성을 다한다. “이 명함을 받는 분에게는 단 한 장이지만, 그분의 인생에서 명함은 자신을 처음 소개하는 도구다. 그 가치를 우리가 만든다”는 그의 철학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이지원 연구위원은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는 자영업의 핵심은 ’대체 불가능한 가치’다. 박종민 씨의 인쇄소처럼 시간과 정성, 장인의 손길이 만드는 가치는 디지털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한국 자영업의 미래도 이런 차별화에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대 디자인학부 한지연 교수는 “활판 명함의 부활은 한국 소비자가 ’진짜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가격이 비싸도, 시간이 오래 걸려도, ’진짜’를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자영업자들이 이 흐름을 잘 읽어내면 새로운 성장 기회가 열린다”고 제언했다.


충무로 좁은 골목, 70년 된 인쇄소에서 박 씨의 손은 오늘도 작은 활자 하나하나를 들어 올린다. 사라져 가는 것을 지키는 일, 그것이 곧 한국 자영업의 또 다른 미래를 만드는 길임을 그의 손이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


 

소상공인포커스 / 이지원 기자 leejy05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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