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 글로벌 벤치마킹⑤] 대만 신주과학단지는 어떻게 세계 반도체의 심장이 되었는가

소상공인 심층/기획 / 서영현 기자 / 2026-10-23 10:4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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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의 아침식사가 국가산업의 출발점이 되다
연구소의 기술을 기업으로 이전하다
모리스 창의 귀환, 산업정책에 사업모델을 더하다
대만 반도체산업의 출발은 TSMC가 아니었다.
▲ 대만이 세계 반도체 산업의 핵심 거점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국가 차원의 장기 산업전략이 있었다. 1970년대 석유위기를 계기로 산업구조 전환에 나선 대만은 해외 기술 도입과 연구기관의 기술 축적, 전문인력 양성, 과학단지 조성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며 반도체 산업의 기반을 마련했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사진=챗GPT)

 

 

반도체 강국은 기업 하나의 성공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국가의 기술 선택과 연구기관의 축적, 해외 인재의 귀환, 과학단지 조성이 반세기에 걸쳐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완성됐다. 반도체 불모지였던 대만은 어떻게 세계의 중심으로 이동했는가. 


석유위기가 대만의 산업전략을 바꾸다. 오늘날 대만은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국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만 경제의 중심은 섬유, 신발, 완구, 조립가공과 같은 노동집약형 제조업이었다. 값싼 노동력과 수출가공을 기반으로 성장했지만, 임금 상승과 국제 경쟁 심화가 시작되면서 기존 성장방식의 한계가 나타나고 있었다.


결정적인 충격은 두 차례의 석유위기였다.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고 세계 경제가 흔들리자 노동집약형 수출산업에 의존하던 대만은 산업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장기 성장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직면했다. 신주과학단지 관리기관은 과학단지 조성의 배경을 1973년과 1978년의 석유위기에서 찾는다. 기존 노동집약형 산업이 충격을 받자 대만 정부가 자본집약형·지식집약형 산업으로의 전환을 국가 과제로 선택했다는 설명이다.


중요한 것은 대만이 위기 이후 단순히 새로운 공장을 유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는 어떤 산업이 앞으로 국가의 생존을 책임질 것인지 검토했고, 전자산업과 집적회로를 장기 성장동력으로 선택했다. 당시 대만에는 반도체 제조기술도, 전문 인력도, 세계시장 경험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부는 완성된 산업을 수입하는 대신 해외 기술을 배우고, 연구기관이 이를 흡수하며, 다시 민간기업으로 이전하는 단계적인 전략을 택했다.


대만 반도체 산업은 기업의 자생적 성장보다 국가가 기술의 방향을 먼저 선택하고 위험을 부담한 산업정책에서 출발했다.

● 한 차례의 아침식사가 국가산업의 출발점이 되다
대만 공업기술연구원(ITRI)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대만 반도체 산업의 출발점으로 1974년 한 차례의 아침식사가 자주 언급된다. 당시 경제부장 쑨윈쉬안, 교통·통신 및 연구기관 관계자, 미국 RCA 연구소 출신 판원위안 등 7명이 모여 대만의 집적회로 산업 진입 가능성을 논의했다. 회의 이후 판원위안은 집적회로 개발계획 초안을 작성했고, 이 구상이 국가 프로젝트로 발전했다.


당시 대만이 마주한 선택은 쉽지 않았다. 독자 기술을 처음부터 개발하려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고, 해외기업의 단순 조립기지로 남으면 핵심 기술은 축적되지 않았다. 대만은 해외 기술을 도입하되 연구기관이 그 기술을 직접 학습하고, 생산과 설계 경험을 국내에 남기는 방식을 택했다.


1976년 ITRI는 미국 RCA와 집적회로 기술이전 및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대상은 3인치 웨이퍼 제조기술뿐 아니라 회로 설계, 공정, 시험, 장비 운용까지 포함됐다. 대만은 19명의 기술인력을 미국으로 보내 설계·제조공정·검증·장비기술을 나누어 학습하게 했다. 단순히 설비를 구입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내 기술의 전체 과정을 익히게 한 것이다.


귀국한 기술진은 1977년 대만 최초의 집적회로 시범공장을 가동했다. ITRI 기록에 따르면 공장 운영 6개월 만에 생산수율이 70%에 도달해 RCA 원공장의 50%를 넘어섰다. 1978년에는 대만산 전자시계용 집적회로가 생산됐고, 이는 대만이 단순 조립국가에서 전자부품 제조국가로 이동하는 계기가 됐다.


이 사례는 기술이전의 성패가 계약서가 아니라 흡수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만은 기술을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구기관이 이를 재현하고 개선하도록 했으며, 축적된 기술과 인력을 이후 민간기업으로 이동시켰다.


■ Timeline | 대만 반도체 산업의 출발
1973년
공업기술연구원(ITRI) 설립
1974년
정부·연구기관 관계자들이 집적회로 산업 진입계획 논의
1976년
ITRI와 미국 RCA가 집적회로 기술이전 계약 체결
19명의 기술인력이 미국에서 설계·공정·시험·장비기술 습득
1977년
대만 최초 집적회로 시범공장 가동
1978년
대만산 전자시계용 집적회로 생산
1980년
ITRI의 기술과 인력을 기반으로 UMC 설립
신주과학단지 운영 시작
1985년
모리스 창, ITRI 원장으로 대만 귀환
1987년
TSMC 설립

● 연구소의 기술을 기업으로 이전하다
대만의 두 번째 선택은 연구기관이 기술을 영구히 보유하지 않는 것이었다. ITRI는 기술개발에 성공한 뒤 이를 민간기업으로 이전하고, 연구인력까지 함께 이동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RCA 기술이전 사업이 성과를 내자 ITRI는 1980년 UMC를 설립하고 4인치 웨이퍼 기술과 연구개발 인력을 이전했다. UMC는 대만 최초의 집적회로 기업이자 신주과학단지의 초기 입주기업 중 하나가 됐다. 1985년에는 대만 최초의 상장 반도체기업으로 성장했다.


연구기관이 기술을 개발하고, 민간기업이 생산과 시장을 담당하는 역할 분담은 이후 대만 반도체 생태계의 기본 원리가 됐다. 국가는 산업 초기의 위험을 부담했고, 연구기관은 해외 기술을 흡수하고 인력을 양성했으며, 기업은 이를 제품과 수출로 연결했다.


여기에는 분명한 정책 철학이 있었다. 정부가 영구적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초기 연구개발과 기술학습을 책임지고, 산업화 단계에서는 기술과 사람을 시장으로 넘긴다는 방식이다. 연구개발이 논문이나 공공기관의 성과로 남지 않고 기업 설립과 생산, 고용, 수출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신주과학단지는 공장 부지가 아니라 인재 귀환의 플랫폼이었다. 1980년 문을 연 신주과학단지는 대만 최초의 과학단지였다. 조성 목적은 단순히 전자기업의 공장을 한곳에 모으는 데 있지 않았다. 연구개발과 생산, 주거와 생활환경을 결합해 해외에서 활동하던 대만계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돌아오게 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신주가 선택된 데에는 지리적 이유도 있었다. 인근에는 ITRI와 국립칭화대학교, 국립교통대학교 등 연구·교육기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구기관에서 개발한 기술, 대학이 배출한 인재, 과학단지에 입주한 기업이 가까운 거리에서 연결될 수 있었다.


대만은 해외 인재에게 애국심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연구시설과 기업 설립 기회, 세제와 행정지원, 자녀교육과 주거환경을 함께 제공했다. 해외에서 경험을 축적한 기술자들이 귀환해 창업하거나 기업 경영에 참여하면서 신주과학단지는 지식과 경험이 순환하는 공간으로 성장했다.


2026년 6월 현재 대만 국가과학기술위원회 통계에서 신주과학단지 권역의 실제 입주기업은 584개, 승인기업은 631개로 집계된다. 이 가운데 집적회로 분야 입주기업은 190개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과학단지가 특정 대기업의 생산거점을 넘어 설계·제조·소재·장비·통신·정밀기계·바이오 기업이 함께 움직이는 산업 생태계로 성장했다는 의미다.


2026년 4월 한 달간 신주과학단지 권역의 산업 매출은 1,907억6,300만 대만달러였으며, 이 가운데 집적회로 산업이 1,417억8,900만 대만달러를 차지했다. 단순 계산으로 약 74%가 집적회로에서 발생한 셈이다. 신주과학단지가 여러 첨단산업을 포괄하면서도 반도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전문 클러스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 Global Data | 2026년 신주과학단지
입주기업 584개
승인기업 631개
집적회로 분야 입주기업 190개
2026년 4월 산업 매출
1,907억6,300만 대만달러
집적회로 산업 매출
1,417억8,900만 대만달러
집적회로 매출 비중
약 74%

● 모리스 창의 귀환, 산업정책에 사업모델을 더하다
대만 반도체 산업의 초기에 기술이전과 인력 양성이 있었다면, 산업을 세계시장으로 확장시킨 인물은 모리스 창이었다. 모리스 창은 미국 반도체산업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경영자였다. 1985년 대만 정부의 요청을 받아 귀환해 ITRI 원장을 맡았고, 6인치 웨이퍼 기술개발과 반도체산업의 사업화 방향을 이끌었다. ITRI 공식 자료는 쑨윈쉬안의 요청으로 모리스 창이 대만에 돌아와 ITRI 원장으로 취임했다고 기록한다.


그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새로운 공정기술만이 아니었다. 반도체를 직접 설계하고 판매하는 기업과, 고객의 설계를 받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기업의 역할을 분리할 수 있다는 사업모델이었다.


당시 주요 반도체기업은 설계부터 제조·판매까지 모두 수행하는 종합반도체기업이었다. 그러나 반도체 공장의 건설비와 공정 난도가 높아지면서 설계 기술이 있어도 생산시설이 없는 기업은 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웠다. 모리스 창은 생산에만 집중하는 전문 파운드리 기업을 만들면 수많은 설계기업이 공장을 소유하지 않고도 반도체산업에 참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87년 설립된 TSMC는 이 판단을 현실로 만들었다. 대만 정부와 ITRI가 기술·인력·초기 자본을 제공하고, 모리스 창이 전문 파운드리라는 사업모델을 결합하면서 대만 반도체산업은 국내 전자제품을 위한 부품생산 단계에서 세계 고객의 핵심 반도체를 생산하는 산업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Key Person | 모리스 창
1931년 중국 저장성 닝보 출생
미국 MIT에서 기계공학 전공
스탠퍼드대학교 전기공학 박사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약 25년간 반도체 경력 축적
1985년 대만으로 귀환해 ITRI 원장 취임
1987년 TSMC 설립
핵심 업적
설계하지 않고 고객의 반도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순수 파운드리 사업모델을 산업으로 정착시켰다.

● 대만 반도체산업의 출발은 TSMC가 아니었다.
1970년대 산업위기 속에서 정부가 반도체를 전략산업으로 선택했고, ITRI가 해외 기술을 학습했으며, 귀국한 기술자들이 시범공장에서 생산 경험을 축적했다. 연구기관의 기술과 인력은 UMC와 TSMC 같은 민간기업으로 이전됐고, 신주과학단지는 대학과 연구소, 기업과 해외 인재를 연결하는 공간이 됐다.


대만이 선택한 것은 특정 기업에 대한 단기 지원이 아니었다. 기술을 배우는 기관,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 기업이 성장하는 과학단지, 위험을 감수하는 정부, 세계시장을 이해하는 경영자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장기 산업전략이었다.


신주과학단지가 세계 반도체의 심장으로 성장한 출발점은 거대한 공장도, 첨단 장비도 아니었다. 무엇을 배울 것인지 결정하고, 누가 기술을 흡수할 것인지 정하며, 그 성과를 어떤 기업과 산업으로 연결할 것인지 설계한 국가의 선택이었다.

 

 

소상공인포커스 / 서영현 기자 93oliv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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