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대만의 공동 브랜드 전략은 어떻게 산업으로 자리 잡았나

소상공인 심층/기획 / 김경훈 대기자 / 2025-04-17 10: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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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아니라 산업이 신뢰를 만드는 방식
'Made in Taiwan'이 곧 보증수표… OEM 하청을 신뢰 자산으로 바꾼 비결
▲ 산업 정책의 목표가 개별 기업 지원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대만 TAITRA가 전시회를 통해 산업 전체의 위상을 높였듯, 우리도 중소기업들이 공동으로 기댈 수 있는 '산업 브랜드'라는 인프라를 설계해야 한다. 기술을 넘어 신뢰 구조를 수출하는 대만식 모델은 한국형 중소기업 정책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이다.(사진=한국전시산업진흥원 제공)
 

 

산업 경쟁력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특정 기업을 떠올린다. 삼성전자나 애플 같은 기업은 하나의 브랜드가 세계 시장에서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세계 산업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기업이 아니라 산업 전체가 하나의 브랜드처럼 작동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특정 기업 이름을 몰라도 국가와 산업의 이름만으로 제품의 신뢰가 형성되는 구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대만 산업 구조를 이해하려면 바로 이 지점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만에서는 개별 기업이 브랜드를 만드는 방식보다 산업 전체가 공동의 신뢰를 형성하는 구조가 먼저 만들어졌다. 대만 자전거 산업, 대만 반도체 산업, 대만 전자 부품 산업은 개별 기업의 경쟁력만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산업 전체가 하나의 신뢰 구조를 형성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공동 브랜드 전략이다.

 

◇ 자전거에서 반도체까지, 개별 브랜드 장벽 허문 산업 클러스터 네트워크


한국 산업 구조에서는 공동 브랜드라는 개념이 비교적 낯설게 들릴 수 있다. 한국 기업은 보통 개별 기업 브랜드를 중심으로 경쟁하는 구조에 익숙하다. 기업이 성장하면 자체 브랜드를 강화하고 경쟁 기업과 차별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대기업에게는 효과적인 전략일 수 있지만 중소기업에게는 상당히 높은 장벽이 된다. 세계 시장에서 브랜드를 구축하려면 막대한 마케팅 비용과 유통 네트워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만은 이러한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다. 대만 산업은 초기부터 공동 브랜드 구조를 형성하면서 산업 전체의 신뢰도를 높이는 전략을 선택했다. 대만 기업 가운데 상당수는 초기 단계에서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해외 기업 제품을 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대만 기업들은 세계 시장의 품질 기준과 생산 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었고 점차 산업 전체의 기술 수준이 높아졌다.


OEM 생산 경험은 단순한 하청 생산이 아니라 산업 역량을 축적하는 과정이었다. 대만 기업들은 글로벌 기업과 협력하면서 기술과 생산 관리 능력을 동시에 축적했고 이러한 경험은 산업 전체의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개별 기업의 브랜드보다 대만 산업 전체의 신뢰도가 먼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세계 시장에서는 특정 기업 이름을 몰라도 “대만에서 생산된 제품”이라는 사실만으로 일정 수준의 품질을 기대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대만 자전거 산업은 이러한 공동 브랜드 전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대만 자전거 산업에는 Giant(자이언트)와 Merida(메리다)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가 존재하지만 이 기업들이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장악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 단계에서 대만 자전거 산업은 수많은 중소기업이 부품 생산과 OEM 생산을 담당하며 산업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구조로 발전했다.


대만 중부 지역에 형성된 자전거 산업 클러스터는 이러한 산업 구조를 잘 보여 준다. 이 지역에는 프레임 제조 기업, 부품 생산 기업, 조립 기업이 서로 연결된 산업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협력 구조는 산업 전체의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기업들은 경쟁 관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산업 생태계를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대만 자전거 산업은 단순한 OEM 생산을 넘어 자체 브랜드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Giant는 초기에는 해외 브랜드 제품을 생산하는 OEM 기업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자체 브랜드를 강화하며 세계 시장으로 진출했다. 현재 Giant는 세계 자전거 시장에서 중요한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대만 자전거 산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대만 반도체 산업 역시 비슷한 구조를 보여 준다.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 대만반도체제조회사)는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기업의 성장 역시 산업 네트워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만에는 반도체 설계 기업과 장비 기업, 소재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산업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산업 네트워크는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대만 산업의 공동 브랜드 전략은 단순히 기업 협력 구조에서 끝나지 않는다. 정부와 산업 기관 역시 이러한 구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TAITRA(Taiwan External Trade Development Council, 대만무역발전협회)는 대만 기업의 해외 시장 진출을 지원하는 기관으로 다양한 국제 전시회를 운영하며 대만 산업 브랜드를 세계 시장에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전시회는 개별 기업 홍보 행사라기보다 대만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보여 주는 플랫폼으로 작동한다.


한국 산업 구조에서는 이러한 공동 브랜드 전략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많은 중소기업이 우수한 기술과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시장에서 독자적인 브랜드를 구축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개별 기업이 글로벌 브랜드를 구축하기에는 자본과 유통 네트워크의 장벽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질문이 등장한다. 중소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별 브랜드를 구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대만 산업 구조는 이 질문에 다른 답을 제시한다. 산업 전체가 공동의 신뢰 구조를 형성하면 개별 기업도 그 산업 브랜드의 신뢰를 기반으로 세계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산업 경쟁력은 개별 기업의 성공 사례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산업 전체가 어떤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산업이 어떤 신뢰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대만 산업이 보여 주는 공동 브랜드 전략은 중소기업 중심 산업 구조에서 어떤 방식으로 세계 시장 경쟁력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 산업 정책이 고민해야 할 질문도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중소기업이 개별적으로 브랜드 경쟁을 해야 하는 산업 구조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산업 전체가 함께 신뢰를 형성하는 구조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산업 경쟁력의 미래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 코너

OEM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주문자상표부착생산)
다른 기업의 브랜드 제품을 대신 생산하는 방식으로 초기 산업 역량을 축적하는 단계에서 많이 활용되는 생산 구조다.
Industrial Cluster (산업 클러스터)
같은 산업에 속한 기업들이 특정 지역에 모여 협력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산업 구조로 기술 협력과 정보 공유를 통해 산업 경쟁력을 높인다.
TAITRA (Taiwan External Trade Development Council, 대만무역발전협회)
대만 기업의 해외 시장 진출을 지원하는 기관으로 국제 전시회 운영과 글로벌 바이어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산업 브랜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TSMC (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 대만반도체제조회사)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으로 대만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대표하는 기업 가운데 하나다.

 

 

소상공인포커스 / 김경훈 대기자 kkh429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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