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 Global Talent Bridge ⑨] 러시아는 왜 기초과학 인재를 포기하지 않는가

이달의 현장르포 / 서영현 기자 / 2026-11-03 14: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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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과학자가 만들어지는 나라
▲ 러시아의 기초과학 교육과 연구 중심지인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본관 전경.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사진=챗GPT)

 

 

새벽 6시, 모스크바 외곽 돌고프루드니. 아직 도시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이지만 모스크바물리기술대학(MIPT) 연구동에는 이미 불이 켜져 있다. 복도 끝 연구실에서 한 박사과정 학생이 전날 밤 정리한 계산식을 다시 확인한다. 화이트보드에는 복잡한 수학 공식과 물리 방정식이 빼곡히 적혀 있다. 잠시 뒤 지도교수가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젯밤 계산은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학생은 노트북을 열어 결과를 설명한다.
“예상했던 값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계산해 보겠습니다.”
교수는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좋습니다. 새로운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짧은 대화는 끝나지만 연구는 다시 시작된다. 이 장면은 러시아 과학 교육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학생은 정답을 외우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만드는 연구자로 성장한다.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를 정치와 외교, 에너지 강국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과학계에서는 지금도 러시아를 수학과 물리학, 우주공학, 기초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자를 꾸준히 배출하는 나라로 평가한다. 세계적인 과학자가 하루아침에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오랜 시간 사람을 연구자로 키우는 교육 시스템을 구축해 왔다.


그 중심에는 MIPT의 ‘Phystech System’이 있다. 일반 대학이 강의와 시험을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MIPT는 학생을 연구실과 국가 연구기관으로 보내 실제 연구를 수행하게 한다. 학생은 강의를 듣는 동시에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교수와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졸업장은 교육의 목표가 아니라 연구자의 출발점이다.


이러한 교육 방식은 러시아 과학계의 오랜 철학을 반영한다. 뛰어난 과학자는 강의실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연구실에서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지도교수와 토론하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과정 속에서 성장한다. 그래서 MIPT의 교수는 강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연구를 함께하는 동료에 가깝다.


학생들의 하루도 일반 대학과 다르다. 오전에는 양자역학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국가 연구소에서 실험을 진행한다. 저녁에는 지도교수와 연구 결과를 토론하고 다음 실험을 준비한다. 시험을 위한 공부보다 연구를 위한 공부가 일상이 된다.


러시아 교육의 또 다른 특징은 기초과학을 산업과 연결하려는 노력이다. 과거 러시아 과학은 순수 연구 중심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MIPT와 스콜코보 혁신센터를 중심으로 학생 창업과 기술사업화를 확대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반도체, 양자기술, 우주항공 분야에서는 대학 연구가 기업과 연결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물론 러시아가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국제 제재와 연구 협력 환경 변화는 국제 공동연구와 인재 교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외 연구자 유치와 글로벌 협력은 이전보다 어려워진 분야도 있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기초과학이다.


러시아는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 연구라도 꾸준히 투자해야 미래 산업이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 오늘 연구실에서 실패한 실험이 20년 뒤 새로운 산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교육과 연구의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세계적인 연구역량을 갖추고 있다. KAIST와 POSTECH,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대학들은 국제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으며, 반도체와 인공지능, 바이오 분야에서도 우수한 연구성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학생을 졸업생으로 키우고 있는가, 아니면 연구자로 성장시키고 있는가. 연구는 강의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업과 연구소, 산업 현장에서 계속 이어질 때 비로소 국가경쟁력이 된다. 러시아가 보여주는 가장 큰 교훈은 천재가 많다는 사실이 아니다. 젊은 학생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국가가 긴 시간을 기다려 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해가 저물고 연구실 불이 하나둘 꺼진다. 아침부터 계산을 반복하던 박사과정 학생도 노트북을 닫는다. 오늘도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도교수는 내일 다시 연구실로 나오라고 말한다. 새로운 질문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은 당장의 수익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기초과학을 포기한 국가는 미래의 산업도 함께 포기하게 된다. 러시아는 이 단순한 원칙을 오랫동안 지켜 왔다. 그래서 오늘도 한 명의 학생은 졸업생이 아니라 미래의 과학자로 성장하고 있다.


● 러시아는 왜 기초과학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인류 최초로 우주를 비행했다. 세계는 한 사람의 성공에 환호했지만, 러시아 과학자들은 조금 다른 질문을 던졌다. “가가린 한 사람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 답은 우주선이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수학과 물리학 교육, 연구소 문화, 그리고 실패를 허용하는 기초과학 시스템이었다.


오늘날 세계는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팅, 반도체를 미래 산업의 핵심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첨단기술의 출발점은 화려한 공장이 아니라 기초과학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러시아 과학 교육은 처음부터 ‘정답’보다 ‘질문’을 중요하게 여긴다.


MIPT 학생들은 강의를 듣는 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연구소로 향한다. 지도교수는 학생에게 공식을 외우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왜 그런 공식이 필요한지, 기존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학생 역시 정답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는 연구자로 성장한다.


이러한 문화는 러시아 과학계의 가장 큰 자산이다. 노벨상 수상자도, 세계적인 수학자도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수학 교육, 대학의 연구 중심 문화, 국가 연구기관과 대학의 협력, 그리고 수십 년 동안 한 분야를 파고드는 연구자의 삶이 축적되어 비로소 세계적인 과학자가 만들어진다.


러시아는 지금도 물리학과 수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올림피아드 입상자를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국제정세 변화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기초과학 교육만큼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눈앞의 성과보다 미래의 가능성을 더 크게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역시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순수과학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연구 성과를 산업으로 연결하려는 노력이 확대되고 있다. 대학은 스타트업과 협력하고, 젊은 연구자는 인공지능과 양자기술, 우주항공, 첨단소재 분야에서 창업에 도전한다. 기초과학은 여전히 중심에 있지만, 이제는 산업과 연결되는 새로운 길도 함께 만들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반도체와 인공지능, 바이오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있지만, 그 기반이 되는 기초과학에 대한 장기적 투자와 연구문화는 얼마나 견고한가. 기초과학은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논문 한 편이 산업이 되기까지는 10년, 20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 긴 시간을 견디는 나라만이 미래 산업을 선점할 수 있다.


러시아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기술을 키우고 있는가, 아니면 기술을 만들어낼 사람을 키우고 있는가.” 세계는 기술패권 경쟁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경쟁의 본질은 사람이다. 연구자를 얼마나 길러내고, 실패를 얼마나 존중하며, 새로운 질문을 얼마나 오래 기다려 줄 수 있는가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


오늘도 MIPT 연구실에서는 한 학생이 또 하나의 공식을 지우고 다시 쓰고 있다. 지금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러시아는 알고 있다. 위대한 과학은 이름난 천재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젊은 연구자에게 질문할 시간을 허락하는 문화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그것이 러시아가 수십 년 동안 기초과학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이며, 지금도 세계가 러시아 과학 교육을 주목하는 이유다.

● 대한민국은 무엇을 키워야 하는가
세계는 지금 반도체와 인공지능, 양자기술, 우주산업을 미래 국가경쟁력의 핵심으로 이야기한다. 각국은 첨단 공장을 유치하고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기술패권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경쟁의 출발점은 하나로 모아진다. 결국 사람이다.


독일은 제조업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엔지니어를 키운다. 스위스는 바이오산업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연구자를 키운다. 러시아는 우주와 원자력, 수학과 물리학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질문할 수 있는 과학자를 키우는 나라다. 산업은 결과이고, 사람은 원인이다.


대한민국도 짧은 기간 동안 세계적인 산업국가로 성장했다. 반도체와 조선, 자동차, 배터리, 디스플레이 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미래의 경쟁은 지금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얼마나 잘 생산하느냐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기술을 누가 먼저 발견하고 산업으로 연결하느냐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러시아의 교육 철학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학생들은 얼마나 많은 정답을 외우고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새로운 질문을 만들 수 있는가. 대학은 졸업장을 주는 곳인가, 아니면 연구자를 키우는 곳인가. 교수는 강의를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한 사람의 연구 인생을 함께 설계하는 사람인가. 이 질문은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대학과 연구기관도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다.


최근 한국에서도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도, 반도체도, 바이오도 결국 기초수학과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이라는 토대 위에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응용기술은 빠르게 따라갈 수 있지만, 기초과학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세대의 연구자가 성장하기까지는 20년, 3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러시아는 국제정세 변화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기초과학 교육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미래 산업은 연구실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첨단산업에 대한 투자는 공장과 장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대학과 연구소, 젊은 연구자,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구문화까지 함께 투자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기술을 유지하는 데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 기술을 만드는 연구자를 키우는 나라로 도약할 것인가. 국가의 경쟁력은 결국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한 명의 학생이 연구자가 되고, 한 명의 연구자가 새로운 기술을 만들며, 그 기술이 산업을 성장시키고, 산업은 다시 다음 세대의 젊은 연구자를 키운다. 이 선순환이 지속될 때 국가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수 있다.


모스크바의 연구실에서 밤늦도록 계산을 반복하던 박사과정 학생은 아직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 한 사람에게 연구할 시간을 주고, 실패할 기회를 주며, 다시 도전할 환경을 만든다. 국가의 미래는 이미 완성된 천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이름 없는 젊은 연구자가 끝없이 질문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사회에 달려 있다.

그것이 러시아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큰 메시지다. 기술은 돈으로 살 수 있다. 공장도 투자로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질문을 만드는 연구자는 단기간에 만들 수 없다. 국가경쟁력의 출발점은 첨단 장비가 아니라 사람이며, 미래를 바꾸는 것은 언제나 한 명의 젊은 연구자에게 질문할 시간을 허락하는 사회였다.

 

 

소상공인포커스 / 서영현 기자 93oliv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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