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지원을 넘어 '공동 거래 시스템' 설계로 패러다임 바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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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품질은 세계 최고지만 가격은 늘 후려치기 당하는 대구 섬유·안경 산업의 역설은 개별 기업의 마케팅 부족이 아닌 '분산된 시장 구조'에서 기인한다. 기업 단위로 쪼개진 브랜드 지원 사업이 디자인 수준에 머무는 동안, 대만은 산업 전체를 하나의 신뢰 단위로 묶어 글로벌 바이어를 상대로 강력한 가격 협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제는 이름뿐인 브랜드를 늘리는 대신, 산업과 시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기억되는 거래'를 만드는 공동의 생태계 설계가 시급하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사진=pexels) |
대구의 섬유 기업들을 만나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제품의 품질은 해외 어느 경쟁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지만, 시장에서는 항상 가격을 낮추라는 요구를 먼저 받는다는 것이다. 전시회에 참가할 때마다 새로운 바이어를 만나고 새로운 샘플을 만들지만 거래는 단발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다음 해가 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투자하지만 그 브랜드가 시장에서 가격을 방어해 준 경험은 많지 않다. 이 반복 구조가 한국 제조 중소기업의 현실이다.
겉으로 보면 브랜드를 만들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 중소기업은 CI 개발, 포장 디자인 개선, 온라인 홍보, 해외 상표 등록 등 할 수 있는 모든 브랜드 사업을 수행한다. 문제는 이 모든 활동이 기업 단위로 분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같은 산업 안에서 동일한 시장을 바라보는 기업들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서로 다른 가격으로, 서로 다른 조건으로 경쟁하는 구조에서는 어떤 브랜드도 가격 결정력을 가질 수 없다.
대만과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대만 기업이 특별히 마케팅을 잘해서가 아니라 산업 전체가 하나의 시장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개별 기업의 브랜드가 산업 신뢰 위에서 작동한다. 한국은 산업이 아니라 기업이 시장에 들어가고, 대만은 기업이 아니라 산업이 시장에 들어간다. 이 차이가 브랜드의 생존 기간을 결정한다.
한국 중소기업의 브랜드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판매 구조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품을 생산하는 조직과 시장을 만드는 조직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브랜드는 홍보 비용으로 인식되기 쉽다. 매출이 줄어들면 가장 먼저 줄어드는 예산이 브랜드 예산이고, 그 순간 그동안 쌓아온 시장의 기억도 함께 사라진다. 브랜드가 비용이 되는 구조에서는 장기적인 신뢰를 만들 수 없다.
대구 안경 산업을 보면 이 문제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세계적인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개별 기업의 이름으로 경쟁해야 하고, 동일한 지역에서 생산된 제품이 서로 다른 가격으로 유통된다. 소비자는 ‘대구 안경’이라는 산업 브랜드를 인식하지 못하고, 바이어는 개별 기업을 상대로 단가 협상을 반복한다. 집적은 존재하지만 시장은 분산되어 있는 상태다.
이 구조에서는 기업이 아무리 노력해도 브랜드가 자산으로 축적되지 않는다. 거래가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시장의 기억이 쌓이지 않고, 시장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가격을 유지할 수 없다. 결국 브랜드는 계속 만들어지지만 시장에서는 계속 사라지는 현상이 반복된다.
정책 역시 이 구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해 왔다. 브랜드 개발 지원은 대부분 기업 단위로 이루어지고, 산업 단위의 공동 신뢰 체계를 만드는 정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 품질 기준, 공동 전시 전략, 공동 수출 조직 없이 각자 브랜드를 만들라는 방식은 결과적으로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게 만든다. 브랜드 정책이 시장 정책과 연결되지 않으면 브랜드는 디자인 사업으로 끝난다.
대만의 사례가 시사하는 것은 단순하다. 브랜드는 홍보의 결과가 아니라 거래 구조의 결과라는 점이다. 동일 산업 안에서 동일한 품질 기준과 동일한 시장 전략을 공유할 때 브랜드는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그 브랜드는 개별 기업의 규모를 넘어서는 가격 협상력을 만들어 낸다.
지금 한국 중소기업에게 필요한 질문도 이 지점에 있다. 개별 기업의 브랜드를 몇 개 더 만드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산업 전체가 하나의 시장 신뢰로 묶이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가. 브랜드가 사라지는 이유는 기업이 약해서가 아니라 시장에 산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상공인포커스 / 김경훈 대기자 kkh429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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