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대만은 브랜드를 ‘기업’이 아니라 ‘산업’으로 만든다

소상공인 이슈&분석 / 김경훈 대기자 / 2025-10-28 16: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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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를 공유하는 공동 브랜드 시스템
▲ 젝시믹스 대만 가오슝 팝업 매장.(사진 = 브랜드엑스코퍼레이션 제공)

 

 

대구 북성로의 공구 상가를 걸어보면 같은 제품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판매하는 수십 개의 점포를 만날 수 있다. 각자의 기술은 분명 존재하고 납품 경험도 충분하지만, 시장에서 그 제품을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하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 생산은 함께 이루어지지만 신뢰는 분산되어 있고, 그 결과 가격은 늘 외부에서 결정된다. 한국 제조 중소기업이 겪는 브랜드의 한계는 개별 기업의 역량 부족이 아니라 산업 구조의 문제라는 사실이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대만은 이 문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었다. 개별 기업이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업이 하나의 신뢰 체계를 공유하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타이중의 공작기계 산업을 보면 수백 개의 중소기업이 부품을 나눠 생산하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하나의 품질 그룹으로 인식된다. 특정 기업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타이완산 공작기계’라는 표기만으로 거래가 성사되는 이유는 개별 브랜드가 아니라 산업 브랜드가 먼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서는 중소기업도 처음부터 글로벌 가격 체계 안으로 들어간다.


이 공동 브랜드는 단순한 로고나 슬로건이 아니다. 공동 연구개발, 공동 품질 기준, 공동 전시 참가, 공동 수출 조직이 결합된 생산 네트워크 위에서 작동한다. 동일한 규격과 품질 검증 체계를 통과한 기업만이 그 산업 브랜드 안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브랜드는 홍보가 아니라 신뢰의 필터로 기능한다. 결국 브랜드는 마케팅 부서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업 설계 단계에서 만들어진다.


반면 한국의 중소기업은 브랜드를 철저히 개별 기업의 과제로 인식한다. 지원 사업도 디자인 개발, 상표 출원, 온라인 홍보처럼 기업 단위에서 이루어진다. 그 결과 시장에 나가면 비슷한 제품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경쟁해야 하고, 공동의 가격 방어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 격차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내려가는 이유는 바로 이 신뢰의 분산 구조 때문이다.

 

 

▲ 안경 매장 내부 모습.(사진 = 소상공인포커스 DB)

 

브랜드는 기업의 얼굴이 아니라 산업의 구조다.


브랜드가 산업 단위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는 거래 방식이다. 개별 기업이 바이어를 설득하는 구조에서는 납품 단가 협상이 반복되지만, 산업 브랜드가 형성되면 바이어는 그 산업군에 진입하기 위해 가격을 받아들이는 위치에 서게 된다. 가격 결정권이 기업에서 산업으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대만 중소기업이 규모에 비해 높은 수익률을 유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구조는 청년 인력의 선택에도 영향을 준다. 산업 브랜드가 존재하면 중소기업에 취업하더라도 세계 시장과 연결된 경험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에 경력의 확장성이 보장된다. 반대로 한국처럼 개별 기업 단위의 브랜드 구조에서는 회사가 곧 시장의 한계가 되기 때문에 인재가 대기업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브랜드 문제는 곧 인력 구조의 문제로 이어진다.


정책의 방향도 이 지점에서 갈린다. 개별 기업의 브랜드 개발을 지원하는 방식으로는 산업 전체의 가격 결정권을 만들 수 없다. 필요한 것은 공동 품질 기준을 만들고, 공동 전시와 공동 수출 조직을 운영하며, 동일 산업군이 하나의 신뢰 체계로 움직이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소기업 지원 정책이 아니라 산업 정책의 영역이다.


대구의 안경 산업을 떠올려보면 이 질문은 더 이상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적인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랜드가 개별 기업 단위에 머물러 있는 한 시장 가격은 외부에서 결정된다. 만약 지역 전체가 하나의 품질 기준과 공동 브랜드 체계로 묶인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생산 클러스터가 곧 시장 신뢰로 이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브랜드는 기업의 얼굴이 아니라 산업의 구조다. 개별 기업이 브랜드를 만드는 방식으로는 가격을 바꿀 수 없지만, 산업이 하나의 신뢰 체계를 공유하는 순간 시장의 협상 구조 자체가 바뀐다.

 

 

소상공인포커스 / 김경훈 대기자 kkh429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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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훈 / 경제부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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