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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컴퓨텍스 전시장, 한국 기업의 부스에서는 단가표가 먼저 오가지만 대만 기업의 상담 테이블에서는 시장 운영 전략이 논의된다. 이 극명한 온도 차이는 개별 기업의 영업력이 아닌, 국가가 설계한 '산업 시스템'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단가 후려치기에 노출된 한국의 점(點) 단위 수출과 달리, 대만은 공급망과 물류, 금융이 하나로 엮인 선(線)의 구조로 바이어를 압도한다. 기술력이 가격을 결정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이제는 '계약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 산업 생태계의 재설계가 시급하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사진=벡스코) |
타이베이 난강전시관에서 열리는 컴퓨텍스 전시장에 들어가면 한국과 대만 기업의 차이는 제품이 아니라 상담 방식에서 먼저 드러난다. 한국 기업 부스에서는 단가표가 먼저 나오고 납기와 최소 주문 수량이 이어지지만, 대만 기업 부스에서는 시장 테스트 물량과 유통 채널 운영 방식이 먼저 논의된다. 같은 전시회, 같은 바이어를 만나고 있음에도 협상의 출발점이 다르다. 이 차이는 기업의 영업 능력이 아니라 구조에서 만들어진다.
대만의 수출 상담은 개별 기업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외무역발전협회가 운영하는 전시 시스템에서는 동일 산업군 기업들이 공동관 형태로 들어가고, 바이어 역시 산업 단위로 매칭된다. 이 과정에서 바이어가 접촉하는 대상은 한 기업이 아니라 하나의 공급 네트워크가 된다.
예를 들어 자전거 산업의 경우 타이중 지역 기업들이 공동으로 시장에 들어간다. 프레임, 구동계, 완성차 기업이 각각 따로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산·공급 체계로 연결되어 상담이 진행된다. 바이어 입장에서는 공급 안정성이 확보된 구조와 계약을 체결하게 되고, 이때 단가 협상은 최우선 항목이 아니라 시장 확장 조건과 함께 논의된다.
한국 중소기업이 같은 자리에서 가격 협상부터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별 기업 단위로 시장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공급망을 묶어주는 구조가 없기 때문에 바이어는 비교 견적을 통해 단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협상을 진행한다. 결제 조건에서도 차이가 나타난다.
대만 중소기업의 상당수는 선적 후 일괄 결제 방식이 아니라 판매 연동형 결제 조건을 활용한다. 이는 현지 유통 파트너와 공동으로 재고를 운영할 수 있는 물류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다. 타오위안 물류 클러스터를 기반으로 한 공동 물류를 통해 여러 기업의 제품이 하나의 창고에서 관리되고, 바이어는 단일 창구로 주문을 처리한다. 이 구조에서는 납품이 끝이 아니라 판매 데이터가 다시 생산으로 연결된다. 즉 첫 계약이 반복 거래 구조로 이어진다.
한국 중소기업의 수출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비율이 높은 이유는 이 반복 구조를 만들 수 있는 현지 운영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물류, 재고, 유통이 모두 개별 기업 책임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바이어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소량 주문과 가격 인하를 동시에 요구한다.
◆ 금융 구조 역시 계약 방식에 영향을 준다
대만의 중소기업은 수출 주문서를 기반으로 생산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 일반화되어 있다. 주문이 들어오면 금융이 연결되고, 생산이 이루어지며, 물류와 재고 운영이 이어진다. 산업은행 성격의 금융기관이 개별 기업의 담보가 아니라 산업 공급망 안에서의 역할을 평가하기 때문에 가능한 구조다.
한국에서는 동일한 주문서를 가지고도 추가 담보를 요구받는 경우가 많다. 이 차이는 기업의 신용도가 아니라 금융이 산업 구조와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로 묶이면서 대만의 중소기업은 바이어와 가격을 협상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공급 안정성, 공동 물류, 반복 거래 구조가 확보된 상태에서는 바이어 역시 단가 인하만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출 통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계약서 첫 장에 들어가는 조건이 완전히 달라진다. 한국의 수출 지원은 상담 건수와 계약 금액으로 성과를 측정하지만, 대만의 수출 시스템은 첫 계약이 몇 번의 반복 거래로 이어졌는지를 핵심 지표로 본다. 이 차이가 중소기업 중심 수출 구조를 만들었다.
대만이 만든 것은 수출을 많이 하는 중소기업이 아니라, 첫 거래부터 시장 운영에 참여하는 중소기업이다. 가격 결정권은 기술에서 나오지 않는다. 계약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 위치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위치는 기업의 규모가 아니라 산업 시스템이 만든다.
소상공인포커스 / 김경훈 대기자 kkh429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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