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기업의 성장 경로는 누가 만드는가

소상공인 심층/기획 / 김경훈 대기자 / 2026-02-12 1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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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별 시장 설계가 만든 차이
▲ 산업 경쟁력은 기업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업이 이동할 수 있는 시장의 사다리가 존재할 때 비로소 축적된다. (사진=벡스코)
 

 

예산은 왜 성과를 만들지 못하는가. 정책은 반복되지만 산업의 위치는 바뀌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다음 단계는 자연스럽게 기업의 성장 경로로 이어진다. 예산이 산업의 위치를 바꾸지 못한다면 결국 기업은 어디에서 성장의 경로를 찾는가라는 질문이 남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기업의 성장을 기업 내부의 노력과 역량의 문제로 이해한다.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 능력을 확장하고 마케팅을 강화하면 기업이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산업 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기업의 성장은 단순한 규모 확대가 아니라 시장 위치의 이동으로 나타난다.


기업은 단순히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한다. 낮은 가격 구조의 시장에서 높은 가격 구조의 시장으로 이동하고 단순 제조에서 브랜드와 유통을 가진 시장으로 이동한다. 이 이동이 가능할 때 기업은 비로소 성장한다.


대만 산업 구조를 보면 이 이동 경로가 비교적 명확하게 나타난다. 대만 제조 산업은 오랫동안 OEM 구조에서 출발했다. 초기 단계의 기업들은 글로벌 브랜드의 주문을 받아 생산을 담당했다. 이 단계에서는 생산 효율과 품질 관리가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었다. 기업은 이 과정을 통해 산업 역량을 축적했다.


그러나 대만 산업 정책은 이 구조에 머물지 않았다. 일정 단계에 도달한 기업들은 ODM 단계로 이동했다. 이 단계에서는 단순 생산이 아니라 제품 설계와 기술 개발이 기업의 역할에 포함된다. 기업은 단순 공급자가 아니라 제품 개발의 파트너로 변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협상력과 기술 축적이 동시에 강화된다.


다음 단계는 OBM 단계다. 기업이 자체 브랜드와 유통망을 갖고 시장에 직접 진입하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 기업은 가격을 협상하는 위치가 아니라 가격을 설계하는 위치로 이동한다. 산업의 이익 구조가 이 단계에서 완전히 달라진다.


이 세 단계는 단순한 기업 전략이 아니라 산업 설계의 결과다. 기업이 OEM에서 ODM으로, ODM에서 OBM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산업 정책과 시장 구조가 함께 작동한다. 기업은 각 단계에서 필요한 경험과 자본을 축적하면서 다음 시장으로 이동한다. 이 구조의 핵심은 성장 사다리다. 기업이 일정한 경험과 역량을 축적하면 다음 단계로 이동할 수 있는 경로가 존재한다. 산업 정책은 이 경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 산업 구조에서는 이 성장 사다리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많은 제조 기업이 일정 수준의 기술과 생산 능력을 확보한 이후에도 동일한 시장 구조 안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기업은 생산 규모를 확대할 수 있지만 시장 위치를 이동하기는 어렵다.


대표적인 이유는 납품 중심 거래 구조다. 납품 구조에서는 기업이 생산 능력을 확대하더라도 가격 결정권은 거래 상대에게 남는다. 기업은 생산량을 늘릴 수 있지만 시장의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이 구조에서는 성장의 의미가 달라진다. 기업은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지만 더 높은 시장으로 이동하지 못한다. 매출은 증가하지만 이익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기업은 규모는 커지지만 산업 안에서의 위치는 그대로다.


이 차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산업 격차로 나타난다. 단계별 시장을 경험한 기업은 거래 구조를 이해하고 가격 협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반대로 동일한 시장에 오래 머문 기업은 생산 능력은 뛰어나지만 시장 협상력은 약한 상태로 남는다.


이 지점에서 다시 질문이 등장한다. 기업의 성장 경로는 누가 만드는가. 기업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인가 아니면 산업 구조와 정책 설계가 함께 만드는 것인가. 산업 정책이 단순 지원에 머물면 기업은 같은 시장에서 더 오래 버티게 된다. 그러나 정책이 성장 경로를 설계하면 기업은 더 높은 시장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산업 경쟁력의 격차로 나타난다.


대만이 보여준 것은 기술 지원의 성공이 아니라 성장 경로 설계의 성공이다. 기업은 이 경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산업의 위치를 바꾸어 왔다. 산업 경쟁력은 기업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업이 이동할 수 있는 시장의 사다리가 존재할 때 비로소 축적된다. 결국 산업 정책의 질문은 다시 이 지점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기업을 성장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같은 시장 안에서 더 오래 버티게 만들고 있는가.

 

 

 정보 코너

기업 성장 단계 구조
OEM단계 : 주문 생산 중심 구조, 생산 효율과 품질 관리 경쟁
ODM단계 : 제품 설계와 기술 개발, 참여 기업 협상력 상승
OBM단계 : 자체 브랜드와 유통망 확보, 가격 결정권 형성

 

 

소상공인포커스 / 김경훈 대기자 kkh429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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