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를 쓸 것인가"가 아닌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정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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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예산 투입보다 시급한 것은 우리 산업이 글로벌 시장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그려낸 '산업 지도'의 복원이다. 정교하게 설계된 좌표 없이 쏟아지는 보조금은 단기적인 연명 수단에 그칠 뿐, 대만처럼 산업 전체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가격 결정권을 확보하는 '구조적 전환'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사진=pexels.) |
정책 논의가 시작되면 대부분 예산이 먼저 등장한다. 어느 산업에 얼마를 투입할 것인지, 어느 기업군을 지원할 것인지가 중심이 된다. 그러나 예산은 방향이 아니다. 예산은 도구이며, 방향을 대신하지 못한다. 산업이 실제로 이동하려면 먼저 이동할 좌표가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
대만의 산업 전략을 분석하면 가장 먼저 확인되는 것은 지원 규모가 아니라 산업 지도의 존재다. 이 지도는 단순한 통계 자료가 아니다. 어떤 산업군이 글로벌 가치 사슬의 어느 위치에 놓여 있는지, 어떤 기술이 결합되어야 부가가치가 상승하는지, 어느 시장에서 가격 협상력이 확보되는지에 대한 구조적 설계도다.
◆ 예산은 수단이며 방향은 설계에서 나온다
이 지도 위에서 정책은 수단이 된다. 예산은 좌표에 따라 배치되고, 실행 기관은 그 좌표를 기준으로 기업을 연결한다. 산업은 우연히 성장하지 않는다. 설계된 방향을 따라 이동한다. 산업 지도가 없는 상태에서 예산은 분산된다. 특정 기술을 강화하는 지원은 이루어지지만, 그 기술이 어느 시장으로 이어질지에 대한 전략은 불명확하다. 기업은 단기 성과를 만들 수 있지만 산업 단위의 전환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정책은 집행되지만 산업 구조는 유지된다.
대만은 왜 좌표를 먼저 그리는가. 산업은 개별 기업의 집합이 아니라 연결된 구조이기 때문이다. 한 기업의 경쟁력은 다른 기업과의 결합 속에서 강화되고, 특정 기술은 시장 접근 구조와 연결될 때만 가격 결정권을 확보한다. 지도 없이 움직이면 기업은 성장할 수 있어도 산업은 확장되지 않는다.
산업 지도를 먼저 설정하면 정책의 순서가 달라진다. 먼저 산업의 위치를 정의하고, 그 다음에 필요한 기술과 기업군을 묶으며, 마지막으로 예산을 배치한다. 이 과정은 단년도 사업과는 다른 시간 구조를 가진다. 산업은 최소 10년 이상의 설계 단위를 요구한다.
◆ 산업은 연결 구조 속에서 이동한다
대만의 산업 설계 방식은 축적을 전제로 한다. 실행 기관은 산업별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분석하며, 글로벌 시장의 가격 구조를 파악하고, 기업 간 협업 가능성을 검토한다. 특정 산업이 가격 압박을 받으면 기술 고도화뿐 아니라 유통 구조 조정까지 동시에 논의된다. 정책은 기술 지원으로 끝나지 않고 산업 위치 조정으로 이어진다.
반면 한국의 구조는 사업 단위 중심이다. 예산은 책정되지만 산업 좌표는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업은 지원을 받지만 그 지원이 산업 전체의 방향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체감하기 어렵다. 정책은 존재하지만 산업은 방향을 잃는다.
산업 좌표가 없는 상태에서 반복되는 지원은 단기적 안정은 만들 수 있지만 구조 전환은 만들지 못한다. 기술이 강화되어도 가격 협상력이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위치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치를 바꾸지 않는 지원은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산업은 생산 능력만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글로벌 가치 사슬에서 어느 단계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이익률이 달라진다. 대만은 이 위치를 끊임없이 조정해왔다. 단순히 더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위쪽 단계로 이동하는 전략을 반복했다. 그 이동은 예산이 아니라 설계에서 시작되었다.
산업 지도가 존재하면 실패도 설계의 일부가 된다. 특정 전략이 시장에서 반응을 얻지 못하면 지도는 수정된다. 수정된 지도는 다음 정책의 출발점이 된다. 이 과정이 축적되면서 산업은 점진적으로 이동한다.
한국이 반복되는 정책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얼마나 지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로 이동할 것인가를 묻는 구조가 필요하다. 산업 좌표를 먼저 설정하지 않으면 예산은 방향을 대신할 수 없다.
산업은 우연히 성장하지 않는다. 설계된 좌표 위에서만 방향을 가진다. 예산은 그 좌표를 따라야 의미가 있다. 설계 없는 지원은 반복을 만들고, 설계 위의 지원은 전환을 만든다. 이제 다음 질문이 남는다. 좌표를 설정한 이후 예산은 어떻게 집행되어야 하는가. 예산은 방향을 따라야 하지만, 방향 없는 예산은 또 다른 반복을 낳는다. 산업 설계의 문제는 결국 집행 구조의 문제로 이어진다.
● 정책 설계 참고 정보 산업 지도 설계 요소산업의 글로벌 가치 사슬 위치 분석 기술 결합 가능성 검토 시장 가격 구조 파악 기업군 네트워크 구성 중장기 이동 목표 설정 좌표 부재 시 발생하는 문제 지원의 분산 집행 기업 단위 성과와 산업 단위 성과의 분리 가격 결정권 확보 실패 단기 성과 중심 평가 구조 전략 수정의 기준 부재 |
소상공인포커스 / 김경훈 대기자 kkh429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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