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대만은 중소기업 금융을 어떻게 성장 자금으로 만들었는가

기획/심층 / 김경훈 대기자 / 2025-07-10 1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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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심사가 아니라 산업 가능성을 평가하는 구조
"담보 없으면 기술도 무용지물"... 과거 실적에만 매몰된 한국 중소기업 금융의 민낯
▲ 한국 중소기업 금융이 과거 실적과 담보에 묶여 ‘생존 안전장치’에 머무는 사이, 대만은 산업 내 위치와 미래 역할을 평가하는 ‘성장 설계 도구’로 금융을 혁신하며 격차를 벌리고 있다. 설비 대출에는 관대하고 시장 진출 자금에는 인색한 현재의 금융 구조를 타파하고, 기업의 기술 전환과 브랜드 독립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산업 프로젝트 중심의 금융 설계가 시급하다.(사진=소상공인포커스 DB)

 

한국에서 중소기업 대표를 만나 금융 이야기를 꺼내면 거의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기술은 있고 거래처도 확보했지만 담보가 부족해 운전자금을 만들지 못하고, 매출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미래 확장을 위한 투자 자금은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하소연이 이어진다.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 제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현장 체감은 “가능한 기업만 가능하다”는 말로 정리된다. 금융이 성장의 사다리가 아니라 생존의 안전장치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도의 유무가 아니라 평가 방식에 있다. 한국의 중소기업 금융은 여전히 재무제표와 담보 중심의 구조 위에서 움직이며, 기술력이나 산업 내 위치, 향후 시장 확장 가능성은 정량화되지 못한 참고 자료로 남는 경우가 많다. 이 구조에서는 이미 일정 수준까지 성장한 기업만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고, 가장 자금이 필요한 전환 구간의 기업은 제도 밖에 머물게 된다.

 

중소기업 금융의 핵심은 금리가 아니라 구조다


대만은 이 지점에서 완전히 다른 선택을 했다. 중소기업 금융을 ‘대출 심사’가 아니라 ‘산업 성장 설계’의 일부로 본 것이다. 대만의 정책 금융 기관들은 개별 기업의 재무 상태만을 평가하지 않는다. 기업이 속한 산업 클러스터, 공급망 내 위치, 글로벌 시장에서의 역할 가능성을 함께 본다. 즉 기업 단독의 신용이 아니라 산업 구조 속에서의 기능을 평가 대상으로 삼는다.


이 차이는 자금의 성격을 바꾼다. 한국에서는 금융이 과거의 실적을 기준으로 움직이지만, 대만에서는 미래의 역할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초기 단계의 중소기업도 산업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면 성장 자금을 확보할 수 있고, 금융은 리스크 관리 수단이 아니라 시장 진입 도구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대만의 반도체 장비 공급망에 들어가는 중소기업은 매출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산업 내 필요성이 확인되면 정책 금융과 투자 자금이 동시에 연결된다. 이때 금융 기관은 단순한 채권자가 아니라 산업 프로젝트의 참여자로 움직인다. 자금 공급 이후에도 기술 개발, 해외 전시 참가, 글로벌 바이어 연결까지 이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자금이 기업 계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장 진입 과정 전체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동일한 상황의 기업이 금융을 신청할 경우 먼저 요구되는 것은 담보와 기존 매출 실적이다. 산업 내 전략적 위치나 향후 공급망 편입 가능성은 정성 평가 항목으로 남고, 실제 자금 공급 결정에는 제한적으로 반영된다. 결국 기술 전환이나 시장 확장을 준비하는 기업일수록 자금 접근성이 낮아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 구조는 지역 산업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구와 경북의 기계·자동차 부품·소재 기업들을 보면 기술력과 생산 경험을 갖춘 기업들이 많지만, 자체 브랜드 전환이나 글로벌 직접 진출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 자금 조달이 멈춘다. 기존 생산 설비를 위한 대출은 가능하지만 유통망 구축, 해외 테스트베드 운영, 공동 브랜드 참여와 같은 시장 진입 자금은 금융 상품으로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만은 이 구간을 정책적으로 메웠다. 중소기업 금융을 산업 클러스터 정책과 연결하고, 클러스터 단위로 자금이 공급되도록 설계했다. 동일 산업군 기업들이 공동으로 연구개발을 수행하거나 해외 전시회에 참가할 경우 개별 기업이 아니라 프로젝트 단위로 금융이 작동한다. 이 구조에서는 실패의 부담도 개별 기업이 아닌 시스템이 나누어 갖는다. 그래서 재도전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가장 큰 차이는 실패 이후의 금융 접근성이다. 한국에서는 한 번의 구조조정이나 신용 등급 하락이 다음 도전을 막는 장벽이 되지만, 대만에서는 산업 내 필요성이 유지되는 한 금융이 다시 연결된다. 금융이 기업의 과거를 심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산업의 미래를 유지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이 구조를 지금 한국 산업에 대입해 보면 장면이 선명해진다. 기술 전환을 시도하는 중소 제조 기업, 자체 브랜드로 시장에 나가려는 지역 기업, 글로벌 전시를 통해 직접 계약을 만들려는 기업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이 자금이다. 그리고 그 자금은 대부분 ‘설비’에는 열려 있고 ‘시장’에는 닫혀 있다. 생산은 지원하지만 판매 구조 전환은 지원하지 않는 금융 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 이 구조가 유지된다면 3년 뒤 한국 중소기업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생산 능력은 유지되지만 가격 결정권은 확보하지 못하고, 기술은 축적되지만 브랜드 전환은 지연되다 결국 글로벌 공급망의 하위 단계에 머물게 된다. 금융이 산업 전환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책의 질문은 명확하다. 중소기업 금융을 ‘대출 제도’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산업 전략의 도구’로 재설계할 것인가. 담보 중심 구조를 유지한 채 지원 규모만 늘릴 것인가, 아니면 시장 진입 단계에 자금이 연결되도록 평가 기준 자체를 바꿀 것인가.


대만의 사례가 말해 주는 것은 자금의 규모가 아니라 자금의 방향이다. 금융이 과거를 보는 순간 산업은 정체되고, 금융이 미래를 보기 시작하는 순간 산업은 이동한다.


결국 중소기업 금융의 핵심은 금리가 아니라 구조다. 성장을 위한 자금은 심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설계에서 나온다.

 

 정보 코너

대만 정책 금융 구조: 산업 클러스터 연계 프로젝트 단위 자금 공급
중소기업 신용 평가: 재무 중심이 아니라 공급망 내 역할 기반 평가
재도전 가능 시스템: 실패 기업의 산업 내 기능 유지 시 금융 재연결
해외 전시·공동 R&D 참여 기업에 대한 연계 금융 지원


 

소상공인포커스 / 김경훈 대기자 kkh429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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